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로베우스 왕조 (문단 편집) ==== [[클로비스 2세]]와 [[시게베르 3세]] ==== 638년 말 병에 걸려 생드니 수도원으로 이송된 다고베르 1세는 639년 1월 19일에 사망했다. 클로비스 2세의 어머니 난틸다 왕비는 다고베르가 축적한 국고의 3분의 1을 얻었고, 클로비스 2세도 3 분의 1을 받았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피핀 1세에 의해 메츠로 이송되어 시게베르 3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6살이었던 클로비스 2세의 공식적인 섭정은 난틸다 왕비였지만, 실권은 에가 궁재에게 넘어갔다. 에가는 641년 사망할 때까지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다고베르 1세가 귀족들로부터 빼앗아간 재산을 원주인에게 돌려줘서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641년 에가가 사망한 후 새 궁재가 된 에르치노알트는 온순하고 친절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청렴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르군트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627년 바나차르 2세가 사망한 후 [[클로타르 2세]]가 왕실의 직할지로 삼은 이래, 부르군트에는 별다른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며, 왕실의 통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부르군트 지역 귀족과 주교들은 프랑크 왕국의 의중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다고베르 1세가 생전에 [[바스크]]인을 물리치고 그들과 손잡았던 가스코뉴 귀족들을 통제하고자 세웠던 윌레바트 공작은 리옹과 발랑스 사이의 영역을 사유지로 삼고 권세를 누렸다. 난틸다 여왕은 642년 오를레앙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자시느이 조카 라그노베르트와 결혼한 플레차드를 부르군트의 궁재로 삼으려 했다. 플레차드는 부르군트 귀족들에게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윌레바트는 이를 따르길 거부하고 프랑크 왕국에 적대적인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642년, 난틸다 여왕은 오를레앙 공의회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해 9월, 클로비스 2세는 에르치노알트와 플레차드와 함께 오툉으로 간 뒤 윌레바트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윌레바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확신하고 전 병력을 동원해 오툉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에서 수많은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전사했고, 윌레바트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플레차드가 부르군트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샬롱에 도착한 직후 열병에 걸려 왈레바트가 사망한 지 11일만에 병사했다. 한편, 시게베르 3세가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게 돌아갓다. 640년 란덴의 피핀 1세가 사망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왕실은 피핀 가문의 강력한 위세를 경계해 피핀 1세의 아들 그리모알트의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평소 피핀 가문에 적대적이었던 바이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인 오토를 란덴 공작으로 선임했다. 얼마 후, 튀링겐 공작 라둘프가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11~12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히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우선 라둘프의 동맹자였던 크로도알트의 아들 파라를 사로잡아 처단했고, 뒤이어 라인 강을 건너 튀링겐으로 진격했다. 라둘프는 언스트루트의 높은 둑에 울타리를 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 병력과 가족들을 울타리 너머 진영에 세우고 장차 있을 전투를 준비했다. 시게베르 3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 프랑크군이 대패해 수천 명의 전사가 전사했고, 살아남은 프랑크인들은 전부 달아났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시게베르 3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안장에 앉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이때 그리모알드가 달려와서 왕이 탈고 있는 말 고리를 잡고 이끌어서 적에게 죽거나 사로잡힐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한 뒤, 시게베르 3세는 라둘프가 제시한 조건에 승복하고 평화 협약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라둘프는 자신을 튀링겐의 왕으로 자처하며 주변 종족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의 부추김을 받은 알레만니 공작 로타리가 642년 란덴으로 쳐들어가 오토를 죽였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일전에 자신을 구해줬던 그리모알트를 란덴 공작으로 세우고 왕국의 통치를 일임했다. 이 무렵 알지셀 왕이 이끄는 프리슬란트인이 다고베르 1세가 공략했던 도레슈타트와 위트레흐트를 도로 빼앗았다. 그 후 시게베르 3세와 클로비스 2세는 실권을 신하들에게 내주고 정치에 별다른 참여를 하지 않다가 각각 656년과 657년에 잇따라 사망했다. 이후 메로베우스 왕조는 급격하게 쇠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